방송연기자가 서 있는 곳,
가야 할 곳
2021.09.15
-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방송산업의 노동환경은 노동조합에게 정교한 전략과 접근을 요구한다.
- 수많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방송연기자 노동시장에서 숲과 나무를 함께 살펴 보아야 할 이유다.
- 조합의 고문노무사인 '노무법인 길'의 표대중 대표와 함께 방송연기자와 노동조합의 현재를 정밀하게 진단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점검해보았다.
Q. 노동조합 고문노무사로서 한연노의 소송 과정, 소송 이후의 활동까지 약 3년간 노조의 행보를 돌아본다면?
우리 스스로 잃어버린 7년이라고 부르는 소송 기간은 소비하지 말았어야 할 시간이다. 한연노가 노동조합법상 노조가 아니라는 법리적으로 황당한 중노위의 결정을 뒤집기 위해 긴 시간을 고통받아야 했다. 보통 노조가 그렇게 긴 법정 투쟁을 하고 나면 노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한연노는 지난 3년 동안 다시 단결력을 갖추고 교섭력을 회복 하며 그동안의 단절을 극복했다. 빠른 시간 안에 노조의 역할을 되찾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Q. 소송을 진행하는 동안 방송시장은 많이 변했다. 이런 변화는 오래전부터 감지되어 오던 것들인데 노조가 소송 이후 바뀐 시장 환경에 잘 대응하고 있다고 보나?
잘하고 있다고 본다. 단, 환경의 변화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앞으로가 더 중요한데 지금 방송시장은 노조 활동에 녹록하지 않기 때문에 전문성을 갖춘 전략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시장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노조원의 요구 사이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가 내부적인 과제다. 노조가 조합원의 고충 처리 기관으로서만 존재한다면 반쪽짜리고, 반대로 법제도 개선 쪽에만 집중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Q. 노동조합은 올해부터 제작사와도 교섭하고 있다. 교섭 채널이 많아지다 보니까 실무적으로 어려운 상황이긴 하지만 방송사와 제작사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방향을 잡는 것이 좋을까?
방송시장의 고용관계, 계약관계가 복잡해지고 있어서 교섭 범위가 넓어지는 현상을 피할 수는 없다. 방송사와 제작사 모두를 통제할 수 있는 통일된 규범을 만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문제는 특정 사용자와의 단체협약을 관련된 사업자 모두에게 법적으로 강제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노조는 연기자가 어디에서 노무를 제공하든 같은 보상과 대우를 받 을 수 있는 시스템 구축, 즉 근로조건의 표준화를 목표로 해야 한다. 다만 표 준화된 근로조건이 꼭 방송사와의 협약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시장의 주도권이 제작사로 넘어갔다면 제작사와의 협약을 표준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근로조건의 표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단결력과 교섭력이 약화된다. 표준화 할 수 없는 영역이 있겠지만 핵심적인 것만큼은 통일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 그걸 찾는 게 노조의 역할이다.
Q. 방송시장의 변화를 주도하는 OTT와의 교섭을 위해서는 그들과 우리 조합원의 관계가 중요한데 OTT는 연기자와 계약하지 않는다. 노조가 OTT 와 직접 교섭이 가능할까?
넷플릭스가 현지 법인을 통해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면 교섭 돌파구를 만들 수 있겠지만 지금은 플랫폼만 제공하면서 자본을 투자해 제작물을 공급받을 뿐이니 현행법상 OTT를 교섭장에 끌어낼 방법은 없다. 그렇지만 사회 분위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반드시 고용계약을 맺은 사용자에게만 교섭 의무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작년에 전국대리운전 노동조합이 플랫폼 사업자인 카카오모빌리티에 교섭을 요구했는데 카카오는 운전기사들과의 고용관계가 없다면서 교섭을 거부했다. 그런데 경기지노위와 중노위는 카카오모빌리티 측에 교섭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최근 법원의 판례도 사용자의 범주를 넓히면서 노동권의 보호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추세다. 직접적인 고용관계가 있는 경우에만 한정하지 않는다. 노동조합을 통해 권익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면 근로조건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주 체와 교섭할 수 있게 유도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발전하는 중이다.
"노동조합의 역사는
곧 근로조건 표준화의 역사다"
Q. 플랫폼 기업이라고 해서 교섭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인가?
개별 사안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겠지만 그런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법적 근거가 없을지언정 OTT에 교섭을 요청할 필요가 있다. OTT가 결국 제작사에 투자하고 제작을 맡기면서 제작사가 연기자의 근로조건을 결정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느냐는 명분으로. 카카오모빌리티의 사례와 똑같지는 않지만, 직접 고용하지 않았더라도 노동조합법상 교섭 의무가 있다는 법리를 준용할 수 있다.
Q. OTT, 방송사, 제작사, 캐스팅 디렉터, 연기자의 관계를 원하청이나 하도급 등 기존 법리로 정리해본다면 어떨까?
건설업을 예로 들면 완성된 건축물을 인도받고자 하는 이가 발주자고, 건축물 완성에 최종 책임을 지는 업체가 원청이다. 원청이 창틀 공사를 하는 업체와 계약하면 하도급 관계가 되고 창틀 시공 업체가 다시 기술자에게 일부 공사를 맡기면 재하도가 된다. 원하청의 기본적인 구조다. 방송사와 제작사의 관계에서 방송사가 원청이 되려면 방송사가 직접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하고 제작사에게 그 일부를 맡겨야 한다. 근데 방송사가 프로그램을 구입할 뿐이라면 원청이 아닌 발주자에 해당하고 이때는 제작사가 원청업체가 된다. 이때도 캐스팅 디렉터를 하청업체라고 보기 어려운 게, 하청업체가 되려면 제작 과정에 투입되어 제작 일부를 담당해야 한다. 인력을 공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Q. 스튜디오드래곤은 제작사이긴 하지만 기획만 하고 제작은 자회사에 위임하는 경우도 있다.
스튜디오드래곤이 직접 제작하는 경우에는 여타 제작사와 같은 위치에 있지만 기획만 하고 제작은 자회사에 맡기면 발주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기획만 하는 경우라도 과연 스튜디오드래곤이 순수한 발주자라고 할 수 있을까. 자회사에 수정을 요청하고, 중간에 보고받기도 하는 등 실질적으로 제작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 원하청 관계에서 발주자는 결과물을 받을 뿐이지 과정에 개입하지 않는다. 스튜디오드래곤이 자회사의 작업 과정을 관리 감독한다면 원청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스튜디오드래곤이 자회사의 작업 과정을
관리 감독한다면 원청이라고 보아야 한다"
Q. 캐스팅 디렉터의 사업이 도급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파견 사업으로는 볼 수 있을까?
일단 캐스팅 디렉터의 사업 영역이 파견 사업 업종에 해당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편집자 주 : △영화, 연극 및 방송 관련 전문가의 업무와 △예술, 연예 및 경기 준전문가의 업무는 파견 허용 업종으로 분류되어 있다) 파견 허용 업종이라면 허가를 받았는지 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캐스팅 디렉터와 연기자 간에 고용계약 혹은 그에 준하는 종속적인 계약이 있음을 특정해야 한다. 고용계약 여부는 일반적인 근로자성 판단 지표와 마찬가지로 전속성, 사용종 속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Q. 캐스팅 디렉터는 건설업에서 일용직 근로자를 모집해서 현장에 투입하는 작업반장과 유사해보인다. 그렇다면 사용자성이 있는 거 아닌가?
가능성이 있다. 건설업에서 일용직 종사자가 동료를 모아 함께 일을 진행하는 것을 노무도급이라고 하는데 이와 달리 턴키식으로 일정 금액을 수령하여 어떤 작업을 수행하고 그 돈을 다른 근로자와 나눈다면 사업주로 본다. 캐스팅 업체의 영업활동이 연기자들 을 모아서 연기자들한테 일을 시키고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파견사업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직업안정법상 중개인은 구인자와 구직자를 연결해주는 말 그대로 중개자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런데 그 선을 넘어 연기자의 근로조건을 결정하고 어느 작품에 출연하는지도 결정한다면 사업자 책임을 져야하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파견업으로 고발해볼 수 있다.
Q. 말씀하신대로 캐스팅 디렉터는 연기자에게 직접 출연료를 지급하는 경우와 중개인으로서 소개만 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연기자는 제작사와 캐스팅 디렉터 둘 중 어느 쪽과 계약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나?
캐스팅 디렉터가 사업주의 지위를 갖느냐에 따라 다르다. 캐스팅 디렉터가 중개인이라면 제작사가 법리적으로 사용자일 것이고, 캐스팅 디렉터가 독자적인 사용자로서 연기자의 투입 여부를 결정하면 일차적으로 캐스팅 디렉터와의 관계에서 고용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파견 여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제작사에 고용되어 있다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캐스팅 디렉터 영업활동이 턴키식이라면
불법 파견 가능성 있어”
Q. 그렇지만 결국 연기자는 현장에서 제작사 PD의 지휘를 받는다.
그래서 파견으로 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파견사업주에게 고용되어 사용사업주의 노무 지휘를 받는 게 파견근로자다. 캐스팅 디렉터가 연기자들의 근로조건 결정 권한을 명확하게 행사하고 있고 계약도 제작사와 턴키 형태로 맺어서 연기자에게 몫을 나눠주는 형태라면 일종의 파견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는 허가 여부에 따라 불법 파견으로 연결될 소지가 있다. 반면 단순 알선이면 캐스팅 디렉터가 사용자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제작사가 결국 연기자의 고용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Q. 방송산업의 구조 때문에 몇몇 방송사나 제작사와의 협상만으로 모든 관계를 규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출연료 미지급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면 모두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한다. 노동조합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출연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이냐가 문제되는데, 실무적인 팁을 드리자면 관련자를 모두 신고하면 된다. 그럼 고용노동부, 노동위원회, 법원이 알아서 판단한다. 그렇지만 큰 그림을 볼 때, 노조가 투쟁전략이나 교섭전략을 짜려면 상대를 특정해야 하는데 연기자의 고용 주체를 하나로 압축할 수가 없는 환경이다. 결국 연기자의 근로자성 문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노동을 제공하는 형태를 고용과 비고용 영역으로 구분할 때 최근에는 그 중간지대가 확대되고 있다. 방송연기자들은 전통적으로 비고용에 가까운 영역에 존재했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여전히 비고용에 가까운 존재이긴 하지만 과거에 비하 면 중간지대로 많이 이동했다. 사회가 근로자를 바라보는 틀이 변했기 때문이다. 최근 학설 중에서는 특수고용계약을 초단기근로계약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배달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나오는 이야기인데, 주문을 받고 배달하는 과정을 일종의 고용으로 본다. 지정된 장소에 지정된 요금을 받고 배달업무를 대행하는 건데 적어도 배달콜을 받은 후부터 배달이 끝나는 시점까지는 임시적 고용이라는 논리다.
Q. 현행법에서 연기자의 출연 계약은 고용이 아니라는 뜻인데
현행법에서는 그렇게 볼 수 없다. 정해진 시간에 촬영장소에 나와 서 대기하고 지휘 감독을 받고, 임의적으로 촬영 스케줄을 못 정하고, 안 나오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점에서, 사용자에 예속된 상태로 용역을 제공하니까 독립된 사업자라고 보기 어려운 건 맞다. 그렇 지만 전속성과 지속성에서 문제가 된다. 전속성은 한 사업장에서 노동을 제공하면 다른 사업장에서 노동을 제공할 수 없는 성질이고, 지속성은 특정 사업자에게 계속적으로 노동을 제공하는 성질을 뜻한다. 연기자에게는 이게 없다 보니까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아이디어를 바꿔보면, 요즘 전속적으로 일하는 근로자가 얼마나 되겠나. 젊은이들은 아르바이트 몇 개씩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있다. 학자 중에서는 그것이 각각 고용이 아니냐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민주노총 같은 경우 그로 인해 초래될 노동 시장의 유연성 확대를 우려해서 반대하고 있지만, 아이디어 차원에서 고정적인 근로기준법상 지표들로는 인정받기 어려우니 넓은 법리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연기자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법령에는 프리랜서와 근로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없기에 근로자 여부는 대법원 판례로 정해진다. 법원은 사용종속관계, 노무지휘 여부, 인사권·취업규칙 적용 여부, 출퇴근 여부, 보수의 노무 대가성 등을 종합해서 사례별로 판단한다. 그러니 연기자도 근로자성을 인정받는 케이스가 나올 수 있다. 그럼 한번 근로자성을 인정받는 법원 판례가 나오면 일괄적으로 적용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같은 사례가 반복되는지 전체적인 경향을 봐야 한다. 고용노동부도 마찬가지다. 근로감독관이 특정 사례의 연기자를 근로자로 판단하는 사례가 나올 수 있지만 그게 매번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보장은 없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인정 문제가 그만큼 복잡하다. 다만 최근 대법원에서 PD와 촬영감독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한 사례가 있다. 이는 연기자에게도 고무적이고 유의미한, 아주 전향적인 판례다. 물론 하나의 사례로 전체가 바뀌는 건 아니지만 이런 사례들이 계속 발굴되면 궁극적으로 연기자들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PD와 촬영감독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한 것은 연기자에게도 중요한
아주 전향적인 판례”
Q. 고용에 대한 책임 의식이 흐려지는 시장 환경과 연기자에게 호의적인 법적 환경이 공존하고 있는 것 같다. 노조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연기자들이 전통적인 의미의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아 온전히 노동자의 권리를 누리는 게 최선이지만 지금 그게 쉬운 상황은 아니니 전체적인 흐름을 보는 게 중요하다. 고용과 비고용 사이 중간지대가 확대되는 양상으로 변하고 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각 계의 논의도 활발하다. 일례로 근로기준법을 왜 사업이나 사업장 단위에 적용해야 하냐는 문제제기가 있다. 근로기준법을 최저임금법처럼 근로조건의 최저기준으로 정하자는 것이다. 특정 사업장에 제한하지 말고 임금이든 출연료든 보수든 다른 사람이 주는 돈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 자기 용역을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들을 위한 기본법으로 하자는 제안이다. 또 최근 발의된 정의당 강은미의원의 노동조합법개정안에는 제35 조와 제36조의 단체협약의 효력 확장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한 사업장 혹은 같은 지역 내에서만 적용했던 효력 확장 법리를 산업별, 직종 별로 확대하자는 것이 골자다. 아직 논의 단계일 뿐이지만 이것이 합 의된다면 한연노와 같은 직종별 노동조합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결국 연기자의 법적지위에 양면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노조가 좀 더 전략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싶어서다. 현행법으로 돌파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지만, 지금처럼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해결해 나가면서 미래를 모색해야 한다. 그런 변화의 과정들이 더 나은10년, 20년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