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대하사극, 젊은층을 사로잡다
시청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KBS 대하 사극 ‘고려 거란 전쟁’이 지난 3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태종 이방원’ 이후 2년 만에 선보이는 정통 사극으로 방영 전부터 기대를 모았던 ‘고려 거란 전쟁’은 스펙터클한 연출과 압도적 스케일로 호평받으며 대중의 관심만큼이나 숱한 화제를 낳았다.
올 초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양규 신드롬’ 역시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은 바 컸다. ‘고려 거란 전쟁’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전쟁 영웅 ‘양규’ 장군의 활약을 재조명하면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SNS상에서 “양규 장군이 전사할 때 TV 앞에 제사상을 차리겠다”, “양규 장군을 프로필 사진으로 쓰겠다”는 말이 회자될 만큼, 평소 사극과는 거리가 멀었던 2030 세대 사이에서도 커다란 반향이 있었다.
이는 지표로도 확인된다. 20∼49세 시청자를 상대로 집계해 방송 트렌드 핵심 지표로 꼽히는 20세 이상 50세 미만 시청률은 3%대를 기록했는데, 이는 젊은 층에서 인기를 끄는 뭇 예능 프로그램과 비교해도 우위에 있는 수치다. 정통 사극 최초로 넷플릭스 국내 시리즈 부문 1위를 차지한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사극이 중장년층의 전유물로 인식되어 오던 상황에서 젊은 층의 적극적인 호응은 이례적인 모습이다.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인물이 아닌 ‘사건’을 소재로 삼으면서 “사극은 템포가 느리고 진부하다”라는 선입견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 주효했다는 평이다. 박진감 넘치는 전쟁을 중심으로 빠르게 극을 전개하며 몰입도를 높였고, 그 과정에서 대중에게 생소했던 현종, 양규, 김숙흥과 같은 인물들을 새롭게 조명하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덕택이다.
이러한 ‘고려 거란 전쟁’의 성공은 사극이 더 이상 특정 연령층에 국한된 장르가 아니라, 세대와 무관하게 폭넓은 대중성과 공영성을 지닌 콘텐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음을 방증한다.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서사를 발굴하고, 트렌드 변화에 발맞춰 빠른 호흡의 전개와 풍부한 볼거리를 선보인다면, 사극도 다른 장르 못지않게 트렌디해질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증명한 것이기도 하다.
레거시 미디어에 트렌드를 더하다
대하 사극과 더불어 KBS를 대표하는 간판 프로그램으로, 종영한 지 3년 5개월 만인 지난해 11월, 시즌 2로 새롭게 단장하며 시청자 곁으로 돌아온 ‘개그콘서트’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과 호흡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꾀하고 있다.
콘텐츠 소비 패턴 변화에 따라 개그 콘텐츠의 중심축이 유튜브, 틱톡을 위시한 OTT·SNS 플랫폼으로 옮겨간 상황에서 레거시 미디어의 틀로부터 벗어나 젊은 세대와의 접점을 넓혀나가려는 모습이 그 예다. ‘개그콘서트’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방송 분량이나 심의 때문에 편집된 내용을 포함한 무삭제 버전을 공개하거나 하이라이트 장면을 1분 내외의 짧은 길이로 편집한 쇼츠 영상을 업로드하는 등, 타 플랫폼을 경쟁 구도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상호 간의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고 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트렌드의 변화를 십분 반영했다. 유튜브 채널에서 시도했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간판 코너로 자리매김한 ‘데프콘 어때요’, 오픈 채팅방을 통해 객석과 즉흥적으로 소통하는 인터랙티브 코미디 ‘챗플릭스’, 관객들의 고민을 즉석에서 피드백하며 진행하는 스탠드업 코미디 형태의 ‘소통왕 말자 할매’ 등, 젊은 층이 공감할 수 있는 소재와 트렌디한 스타일로 호평받고 있다.
획기적인 시도도 돋보였다. 지난 5월 5일에는 ‘어린이날’을 맞이해, ‘개그콘서트’ 역사상 처음으로 시청 등급을 전체 관람가로 조정하며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모든 세대가 공감하며 시청할 수 있는 코너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공영방송이 보여주는 새로운 가능성
KBS에 있어 대하 사극과 코미디 프로그램은 공영방송으로서의 존재 의의와 수신료의 가치를 증명해 온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수익성과 화제성이 높지 않아 상업 방송에서는 선뜻 제작하기 어렵기에,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KBS의 몫처럼 여겨져 온 부분도 있다. 실제로 KBS는 방송법에 따라 방송의 공익성 실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책임이 있는 만큼, 이들 프로그램의 제작은 공영방송의 의무이기는 하다. 하지만 공영방송은 공익성을 추구하는 것과 동시에, 대중성을 충족시켜야 할 필요도 있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결국 대중에게 소비되어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간 KBS는 레거시 미디어의 중심축으로, 젊은 세대에게는 고리타분한 느낌으로 다가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민영 방송사에 비해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 KBS가 <고려 거란 전쟁>과 <개그콘서트>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점은 박수받을 만하다. 화제성이 떨어지는 장르라는 선입견, 젊은 세대에게는 어필할 수 없다는 편견을 극복하고 이룬 성과기에 더욱 그렇다.
유튜브와 같은 OTT 플랫폼이 인기를 끌면서, 알고리즘을 토대로 특정 집단만을 대상으로 편중된 콘텐츠가 범람하고 있다. 그렇기에 <고려 거란 전쟁>과 <개그콘서트>가 보여준 가능성은 의미가 크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 모든 세대가 공감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영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완성도 높은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KBS의 가치를 재고하는 방법이며, 시청자들이 바라왔던 공영방송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