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30일, 22대 국회가 개원했다. 민생을 개선할 법안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때, 연기자들의 생존권 보장 및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노동조합은 무엇을 요구해야 할까. 한연노가 22대 국회에 바라는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1. 출연료 체불 제작사, 강력 제재
지난 6월 한 노동인권단체는 신문고에 접수된 방송업계 누적 체불임금이 12억 원 이상이며 실제 피해 규모는 수십억을 넘어설 것이라 밝혔다.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에도 출연료 미지급 신고가 계속 접수되고 있다. 최근 두 드라마에서 발생한 조합원 출연료 미지급액은 총 3억 2천여만 원에 달했으며 거듭된 조합의 항의와 지급 요구에도 제작사는 계속해 지급을 미루고 있다. 출연료 미지급 상황에서 연기자들은 고용 형태의 특수성 때문에 고용노동부에 신고해도 적절한 법적 보호를 받기 어려우며, 향후 캐스팅에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쉽지 않다. 고용노동부가 고액·상습 체불 사업자 리스트를 공개하고 있으나 고의적이며 상습적인 사업주를 막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하다. 제작한 콘텐츠가 편성·공개되지 않더라도 연기자들에게 계약상 임금이 정상 지급되도록 출연료 미지급 제작사에 대한 강력한 제재 방안이 필요하다.
2. 연기자 최저 출연료 제도 도입
특수고용 노동자로 분류되는 연기자는 임금 하한선이 없다. 이에 제작사는 촬영에 필요한 온갖 제반 비용을 연기자가 부담하게 하는 방식으로 가장 열악한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고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콘텐츠 산업이 활발한 국가의 경우 작품에 투입된 시간 또는 일수를 기준으로 연기자 최저 출연료가 제도화되어 있다. 또한 출연 빈도가 낮을수록 최저 출연료를 높게 책정해 연기자들의 생계를 보장한다.
연기자 최저 출연료 법제화는 조합원들의 생계와도 직결된 사안이다. 최저임금법 제5조 3항은 임금을 통상적으로 정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은 경우 최저임금액을 따로 정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2025년부터 최저임금위원회를 통해 직종별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에 관한 본격적 심의가 이루어질 전망이다. 한연노는 올해 하반기 발표될 ‘방송연기자 표준보수 지침 제도화 방안 연구 보고서’를 바탕으로 연기자 직군 최저임금 심의에 노동조합 의견을 적극 개진할 방침이다.
3. 표준계약서 사용률 제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제정·보급하는 표준계약서가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 이를 토대로 계약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즉 가이드라인은 있지만 실효성은 매우 미미한 실정이다. 사적 영역인 산업 계약 관계에 정부가 표준계약서를 강제하기는 쉽지 않다. 결국 표준계약서 사용률을 제고하기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한데, 표준계약서를 사용해 계약을 체결했을 때 제작비 지원, 세제 혜택 등의 지원이 제작사에 가장 현실적인 유인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영화계에서도 몇 년 전부터 실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바 있어 실효성을 기대해 볼 수 있다. 표준계약서 사용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연기자들의 실질 근로조건은 상당 부분 개선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4. 글로벌 OTT와의 단체교섭을 위한 법 개정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OTT 기업들은 한국 콘텐츠를 통해 시장을 확장했지만, 제작사에 외주를 주는 형태로 현지 법망을 교묘히 피하는 방식으로 사용자성을 부정하며 노동조합의 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근 ‘노무를 제공하는 자와 직접 계약을 하지 않더라도 노동조건에 관해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면 사용자라고 볼 수 있다’는 판례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점차 바뀌고 있다. 해당 판례를 바탕으로 현재 국회에서는 원청과의 교섭을 인정하는 내용을 포함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노란봉투법)’이 재발의된 상태이다. 미국의 경우 연기자가 가입한 노동조합(SAG-AFTRA)이 글로벌 OTT가 속한 영화·방송제작자연맹(AMPTP)과의 정기적 교섭을 통해 임금인상, 수당, 보너스 금액에 관한 꾸준한 성과를 보여 왔다. K-콘텐츠의 위상에 걸맞은 연기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이 시급한 만큼, 글로벌 OTT가 국내 노동조합과의 단체교섭에도 적극 나설 수 있도록 관련 법 개정이 필요하다.
5. 생성형 AI(Generative AI) 규제
최근 할리우드 배우 스칼렛 요한슨이 오픈AI가 본인 목소리를 무단 사용한 것과 관련해 법적 대응 하겠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미국의 경우 SAG-AFTRA가 작년 단체교섭을 통해 AI 디지털 재창조에 관한 연기자 보호 조항을 관철했지만, 계속해서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양상이다. 국내 콘텐츠 시장 역시 일자리 축소, 저작권 이슈 등 생성형 AI 기술 관련 연기자들의 권리 침해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국회 개원 후, AI의 정의부터 출발해 산업 육성 및 신뢰 확보를 다루고 있는 법안이 발의됐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국내의 경우 AI 기술 발전에 따른 저작권 개정을 비롯해,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도 전무하다. 제작사가 연기자와의 합의 없이 AI를 통해 이미지·소리 등을 생성하지 않도록 제재하며, 연기자를 활용한 AI 재창조의 경우 연기자에게 상응하는 보상을 제공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 제정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