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큼 다가온 AI
지난해 할리우드를 강타한 미국 배우·방송인노동조합(SAG-AFTRA) 파업의 쟁점은 크게 봤을 때, 한국의 저작인접권료에 해당하는 재상영분배금(Residuals), 출연료, 그리고 AI(인공지능), 세 가지였다.
언뜻 생각하기에 의아할 수 있다. 모두들 AI니 4차 산업혁명이니 이야기하지만, 정작 우리의 일상에서 체감되는 바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AI란 마치 영화 ‘아이언맨’에 나온 자비스처럼 사람이 원하는 바를 미리 눈치채고 알아서 가려운 곳을 긁어주거나, 혹은 큰 수고로움 없이 무언가를 뚝딱하고 만들어주는 만능 기술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아직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지는 AI 기술이 할리우드 파업의 주요 쟁점이었다는 사실이 생경하기도 하지만, 사실 AI는 우리의 삶에 무척이나 가까이 다가와 있다. 특히나 AI 기술을 적용하기에 가장 최적화된 엔터테인먼트 산업, 그 최전선에 있는 할리우드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AI 기술의 발전 속도가 어떠하길래, 할리우드에서는 AI가 배우와 작가의 일자리를 빼앗고 산업 전반을 잠식할 거라며 우려하는 걸까.
생성형 AI : 게임체인저의 등장
최근 1년간 뉴스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키워드 중 하나를 꼽자면 단연 ‘생성형 AI’를 꼽을 수 있다. AI까지는 알겠는데, 그 앞에 붙은 ‘생성형’이란 무슨 의미일까. 말 그대로, 명령어(prompt)를 입력하면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결과물을 생성해주는 AI를 뜻한다. 즉, 학습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존의 데이터와 유사하긴 하지만 세상에 존재한 적 없던 새로운 형태의 텍스트, 그림, 영상, 음악 등의 콘텐츠를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자동으로 만들어주는 시스템이다.
그간 구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분야가 없었던 탓에 우리 실생활에서 AI 기술이 사용되지 못했으나, 이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사용자는 아이디어를 현실에서 큰 비용 소모 없이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생성형 AI 중 우리에게 가장 유명하고 익숙한 챗GPT의 등장으로 촉발되었다. 이전부터 여러 생성형 AI 서비스들이 웹을 통해 제공되었으나 성능이 조악하고 인간의 언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에 실제로 널리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오픈AI가 2023년 3월 14일 공개한 ‘ChatGPT-4’는 뛰어난 학습 능력과 성능으로 단숨에 우리를 매료시켰다. 한 시간 분량의 유튜브 동영상을 간단하게 요약해주기도 하고, 사용자가 원하는 내용만 기입하면 마치 일러스트레이터가 직접 그린 듯한 그림을 그려주기도 한다. 매월 3만 원 가량의 비용을 지불하면 챗GPT의 기능을 무한히 활용할 수 있으며, 심지어 다소 성능이 떨어지긴 하지만 무료 버전도 이용할 수 있다.
이렇듯 비용과 시간, 결과물적인 측면에서 별다른 제약 없이 자신이 원하는 창작물을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생성형 AI의 등장에 따라, 아직 활용 초기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방송 및 광고산업에서 이미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AI, 이제는 영화까지 만든다
지난 2월, 오픈AI는 챗GPT를 활용해 고품질의 영상을 생성하는 ‘AI Sora’를 소개하면서, ‘AI Sora’를 이용해 제작한 영상을 함께 공개했다. 마치 실제로 일본의 도심을 걷는 듯한 자연스러운 여성의 모습에, 전 세계는 기대와 동시에 충격에 빠졌다. 키워드만 입력하면 1분 남짓 길이의 고품질 영상을 뚝딱 만들어내는 새로운 기술의 출현이었다.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동영상도 제작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지난 3월 두바이 AI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한국 영화 ‘원 모어 펌킨(One More Pumpkin)’은 스토리 작성부터 배경음악까지 생성형 AI 기술만으로 제작되었다. 실사 촬영과 CG 보정 없이 모든 작업을 생성형 AI로 진행한 만큼, 제작에는 불과 5일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 역시 영화제에 ‘AI 영화’를 품기 시작했다. 지난 7월 4일에 개막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국내 영화제 최초로 ‘AI 영화 경쟁 부문’을 도입했고, 오는 12월 처음 개막 예정인 ‘부산국제인공지능영화제’에서는 작품의 일부나 전체를 AI로 제작한 3~15분 사이의 영화를 출품 대상으로 삼을 만큼, AI는 영화산업의 중심으로 성큼 다가왔다.
영화계뿐만 아니라 광고계에도 생성형 AI가 침투하기 시작했다. 최근 한 주류 업체는 생성형 AI를 사용해 제작한 맥주 광고를 공개했다. 빙하 지대를 배경으로 삼아 청량한 이미지를 강조한 광고는 누군가 AI를 사용해 제작한 것이라고 말해주지 않는다면 알아챌 도리가 없다. 모 글로벌 브랜드에서 공개한 음료수 광고 역시 미술관을 배경으로 액자 속 인물들이 현실로 나와 음료수를 두고 다투는 장면을 그렸는데, 이 역시 사람이 아닌 생성형 AI가 만들었다. 생성형 AI가 텍스트 정보나 이미지를 넘어 동영상을 만드는 단계로 나아가자, 광고 회사들이 관련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AI가 광고와 영화 업계를 완전히 뒤흔들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누가 진짜 사람이야?
생성형 AI는 흔히 ‘디지털 휴먼’ 또는 ‘가상 인간’이라고 부르는 기술과도 접목되고 있다. 과거에도 사이버 가수 ‘아담’이나 버추얼 캐릭터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이들이 하나하나 인간의 손길을 거쳐 탄생한 것이라면, 디지털 휴먼은 컴퓨터 그래픽, 모션 캡처, 음성 합성 등 다양한 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실제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가상 인간’을 디지털로 구현해 낸 뒤, 생성형 AI를 이용하여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문장을 소리내어 읽게 하거나 동작을 취하게 하는 등,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디지털 휴먼은 크게 실존 인물의 외형이나 음성을 복제한 경우(본체가 있는 경우)와 생성형 AI 등을 활용해 전에 없던 새로운 외형과 음성을 만들어내는 경우(본체가 없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본체가 있는 디지털 휴먼 기술은 이전부터 국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MBN에서는 김주하 앵커를 디지털 휴먼화 한 ‘김주하 AI 앵커’를 이용해 뉴스를 진행하고 있으며, 전국 각지의 경로당에서는 ‘AI 태진아’가 노인들의 건강관리를 도우며 말동무로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한 TV 프로그램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고 박윤배 배우를 디지털 휴먼으로 부활시켜 과거 전원일기 출연진과 해후하게 하며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본체가 없는 디지털 휴먼 기술 역시 생성형 AI가 발전함에 따라 점차 활용 범위가 확산되고 있다. 모 홈쇼핑에서는 가상인간 ‘루시’를 쇼호스트로 앞세워 라이브 커머스를 진행했으며, 국민대학교 AI 디자인학과 교수들과 학생들을 중심이 되어 런칭한 3인조 AI 걸그룹 ‘키지’는 멤버의 이름과 설정부터 챗GPT를 이용했고, 음원 제작과 인물 생성, 디자인, 영상 편집 등 제작 과정 전반에 AI 프로그램을 활용한 바 있다.
다만, AI가 학습하는 과정에서 실존하는 인물의 외형이나 목소리를 무단으로 도용할 수 있기에 초상권 이슈는 해결해야 할 문제다. 또한 가상의 디지털 휴먼 배우가 실제 배우를 대체할 경우, 연기자들의 일자리 문제가 심화될 수 있다는 점은 고민해 볼 대목이다.
딥페이크: AI의 그늘
AI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딥페이크(deepfake)’ 이슈 또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딥페이크란 AI 기술을 이용해 원본을 조작하거나 합성하여 만들어낸 이미지 혹은 영상물로, AI 심층학습을 뜻하는 딥러닝(deep learning)과 가짜를 의미하는 페이크(fake)가 결합된 합성어다.
지난 1월,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해 세계적인 팝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얼굴과 음란물을 합성한 이미지가 널리 퍼지면서 딥페이크 이슈가 여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딥페이크 규제 논의가 공론화되기도 했다. 최근 국내에서도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해 유명인의 얼굴과 목소리를 AI와 합성하여 실제와 유사하게 만든 뒤 이를 범죄에 이용하는 신종 사기 범죄가 성행한 바 있다.
그러나 드넓은 인터넷 공간에서 딥페이크를 모두 막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사례와 같이 단순히 음란물로 소비되는 것을 넘어, 배우 엠마 왓슨의 목소리를 복제해 오디오 클립을 제작하거나, 할리우드 스타 톰 행크스의 젊은 시절 모습을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해 광고에 무단으로 도용하는 등, AI를 이용한 딥페이크 기술이 점차 정교해지고 이를 상업적으로 악용하는 행위가 증가함에 따라 배우들은 더 이상 자신의 목소리나 이미지를 통제할 수 없을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
AI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AI라는 시대적 조류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도 산업계 전반에 걸쳐 AI를 적용하고자 하는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특히 생성형 AI가 비용, 시간 측면에서 콘텐츠 창작에 높은 능률을 보여줌에 따라 방송, 광고 업계에서는 AI 관련 기술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정부에서도 이러한 추세에 발맞춰 디지털 전환을 가속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작년 9월 과기정통부에서는 ‘AI와 디지털 기반의 미래 미디어 계획’을 통해 미디어·콘텐츠산업에 디지털 휴먼 도입을 적극 지원하는 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제작비 절감과 새로운 일자리 창출이라는 이해관계가 맞물려, 정부와 콘텐츠 업계는 AI 사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산업 전반에 AI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AI가 콘텐츠산업 전반에 활용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임에 틀림없지만, 기술의 발전 속도와 생산성을 생각했을 때 그 파급력을 간과할 수 없는 만큼 공론의 장에서의 충분한 토의와 사회적인 공감대가 절실하다.
AI로 인한 연기자들의 일자리 감소, 딥페이크, 저작권·초상권 침해 등 AI와 관련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었던 할리우드 파업이 정확히 1년 전 이맘때 시작되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AI에 대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되돌아보고, 이제는 AI와 공존할 방법에 대해 머리를 맞댈 시점이다.